사물놀이의 정의
사물놀이의 역사
사물놀이 악기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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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 탄생한 사물놀이는 그 음악적 배경은 전통 풍물에 두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뿌리는 남사당에 있다.

남사당은 스스로의 삶 속에서 신명을 만들어낸, 가장 한국적인 연행 형태를 간직했던 마지막 전문 예술인 집단이었다. (남사당의 해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 전통 문화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78년 사물놀이의 창단 멤버들은 모두가 남사당의 피를 직접 이어 받았고, 어릴 적에 스스로 남사당의 마지막 연희꾼으로 남사당의 쇠락을 지켜보았던 이들이었다.

사물놀이가 가지는 생명성을 우리 풍물의 유구한 역사와 신명과 함께 일상 생활을 영위한 우리의 민족성과 결부짓지 않을 수 없다. 그 깊고 먼 연원을 알아보자.

한국은 예로부터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그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농사를 짓는 공동체문화를 가꾸어왔다. 이것은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한국의 속담처럼 분명히 효율적인 생산방식이었으며, 또한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 한 사람씩의 논이나 밭을 돌아가며 일을 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정겨운 것이다. 짐작컨대 한국사람들이 아직도 자기 집이나 심지어는 자기 부인과 가족을 일컬을 때도 '내 집', '내 마누라', '내 가족'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 '우리 마누라', '우리 가족'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렇게 공동노동을 할 때는 반드시 모두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몇몇 사람들이 옆에서 꽹과리, 징, 장고, 북 같은 타악기를 연주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어찌 보면 이솝우화의 개미와 베짱이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1920년대에 일제의 치하에 있던 한국의 토지실태를 조사하러 다니던 일본학자들의 기록에도 나와있다. 그들도 처음에는 대단히 이상한 풍습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곧 여기에 한국인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음을 파악하였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느린 장단을 연주하다가 일이 점점 힘들어 질수록 더욱 신나고 빠른 장단으로 바꾸어가며 연주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하였다. "비록 일은 힘들어도 그 음악소리 때문에 호미찍음이 더욱 깊어진다."

사실 꽹과리, 징, 장고, 북을 연주하거나 모두 모여 춤추고 노래 부르는 풍습은 공동노동을 할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마을의 모든 집을 차례로 방문하여 한 해의 복을 빌어줄 때나, 농사철이 끝나고 가장 농사를 잘 지은 농민을 뽑을 때, 추수를 하고 축제가 벌어졌을 때, 그리고 심지어는 전쟁터에서나 혹은 사람이 죽어 장례를 지낼 때도 꽹과리, 징, 장고, 북은 빠지지 않았다. 이 네 가지 악기들을 '사물(四物)'혹은 '풍물(風物)'이라고 불렀다. 이렇듯 사물은 한국인의 생활 속에서 늘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 했다. 그리고 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나아가 이렇게 하나된 사람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이러한 풍습은 적어도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사람은 농사를 지을 줄 알게 되면서 무리를 지어 살았다.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하늘의 움직임이다. 아무리 사람이 땅에다가 피땀과 정성을 쏟아서 농사를 지어도 하늘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다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의 흐름을 보고 사람들은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서로 잘 통해야만 그 안에 사는 사람이 풍요롭고 평안해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상징이 바로 '양태극(兩太極)'이다. 이 때 태극에서 하늘과 땅을 둘로 분할하는 선이 직선이 아니라 유연한 곡선인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즉 태극은 상대(相對)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相補)이며 상생(相生)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곧 조화를 뜻하고 조화란 서로의 성질과 기운을 잃지 않으면서 잘 어울려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태극은 중국에서 중심적으로 쓰고 있는 반면에 한국은 이를 삼태극(三太極)의 형태로 발전시켰다. 삼태극에서 하늘과 땅 이외에 또 다른 한 부분은 바로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태극의 경우에는 객관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던 하늘과 땅이 인간의 주관적 인식세계로 흡수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하늘과 땅과 마찬가지의 격(格)을 부여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선인들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나아가 하늘과 땅과 사람의 기운(氣運)이 조화롭게 상생(相生)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를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사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그들이 떠받드는 우두머리를 앞세워 좋은 날을 가려 하늘과 땅에 제사도 지내고 축제를 벌이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곧 '제천의식(祭天儀式)'이다. 이 때의 우두머리는 '단군 할아버지'였고 그는 한 부족의 왕이자 유일한 제사장(祭司長)-다른 말로는 '무당(巫堂)'-이었으니 감히 왕이 아니면 백성의 뜻을 모아 하늘과 땅을 우러러 제사를 지내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제천의식에는 반드시 음주가무(飮酒歌舞)가 따랐으며 놀이와 음악이 빠질 수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상형문자로 나타낸 것이 바로 '巫(무)'자인데 이 글자의 윗부분을 가로 지은 획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랫부분의 가로 지은 획은 땅을 상징한다. 그리고 하늘(天)과 땅(地)의 사이에는 사람들(人+人)이 있어서 이 天·地·人이 하나로 잘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힘을 모아 제사와 축제를 벌이는 것이 나타나있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굿'이라고 한다. 이 때 이러한 대동(大同)의 굿판에서 우리 조상님들께서 누리셨을 음악의 모습은 당연히 '두들소리', 즉 타악(打樂)이 그 시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언가를 두드려서 무리를 하나되게 하고 그 하나된 무리의 힘을 모아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일은 이렇듯 우리의 삶 속에서 싹튼 것이며 이것이 곧 사물놀이의 뿌리이다.

그 이후 왕은 규율을 세워 백성들을 다스리거나 다른 부족을 침탈하여 그들의 곡식과 노고로 부강해지거나 반대로 외적을 막는 일 등의 권력자의 역할이 강해지면서 하늘을 달래어 땅에서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제사장의 기능은 떨어져나가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역사는 점점 복잡다난한 쪽으로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두들소리'의 모습과 방식 또한 '마을풍물굿'과 '무굿' 그리고 '전문연희패'등의 그것으로 크게 나뉘게 된다. 농민에 의해서 연행(演行)되어온 '마을풍물굿'은 앞서 말한 굿의 전통이 가장 잘 살아서 있는 형태이며 최근까지 전승되어 왔다. 이는 농사가 주업인지라 두들소리에는 당연히 비전문가들이었고, 그들의 풍습과 관습에 따라 그들의 공동체적인 삶 속에서 연행(演行)되어진 것이다. '무굿'은 남을 대신하여 제사와 축제를 주관하는 무당이라는 전문가가 살(煞)을 풀고 신명(神明)을 돋우는 여러 형태를 말한다. '전문연희패'는 '봉산탈춤패'등과 같은 탈춤패나 '남사당(男寺堂)' 등의 '전문예인유랑집단'을 일컫는다. 비록 이들은 떠돌이였으나 최고의 기량과 예술성을 자랑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연희능력이 곧 생활의 수단이며 판을 벌리는 곳이 바로 생활의 터전이므로 각종 놀이에 대한 학습이 엄격하였다. 아무리 행중(行中)에 오래 몸을 담았어도 학습이 미진하거나 재능이 뒤떨어지면 제대로 한 몫을 받지 못하였고,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재주가 있어서 혼자서 여러 몫을 한다면 또한 그만한 댓가를 받곤 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의 큰 갈래 중에서 사물놀이의 모태가 된 것은 '전문예인유랑집단'인 '남사당(男寺堂)'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여러 '굿'판-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뜻과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내고 놀이를 하는-에서 우리 조상님들의 삶과 함께 하여 왔던 우리의 두들소리는 일제 36년간의 강점기간 동안과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그 이후 우리민족이 거쳤던 서구화, 근대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삶과는 점 점 멀어져 갔다.

이 때에 어려서부터 남사당과 같은 전문예인집단에서 최고의 예기(藝技)를 익히며 잔뼈가 굵은 20대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한 때는 판이 벌어지면 온갖 귀염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몇 몫의 놀이채를 받았던 재간동이들이었으나 그들이 20대가 된 1970년대에는 그들이 날개를 펼칠 만한 판 또한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들이 뭉쳐서 사물놀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굿판을 벌리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사라져 가는 굿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 노력은 진정한 의미의 전통이란 사라진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꿈틀거리며 이 시대와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은 우리 조상님들의 얼과 신명이 담긴 가락과 몸짓을 이 시대의 정서와 모습에 맞게 재창조하는 일이었다.

그 시작이 1978년 2월이었고 그 때 여러 사람들의 뜻을 모아 지은 단체의 이름이 바로 "우리 풍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꽹과리, 징, 장고, 북의 네 가지 악기를 가지고 놀이를 하는 두들소리패"라는 뜻의 '사물놀이'였던 것이다.

지금은 '사물놀이'라는 말을 마치 한국의 전통예술 중에서 꽹과리, 징, 장고, 북을 가지고 연주를 하는 한국전통예술 중의 한 장르를 일컫는 보통명사로 쓰고 있지만 사실 사물놀이는 1978년에 생긴 한국 전통 타악 연주단체의 이름이었다.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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